[INFJ] 여백의 시간
최근 몇년간 삶에 큰 변화를 주면서 저의 삶은 백지처럼 리셋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마치 짓던 건물을 전부 허물고 처음부터 다시, 조금 더 맞춤식으로 다시 지어 나가고 있는 중이라고 저는 봅니다. 이제 40 초반에 접어든 지금, 친구들은 각자 자리에서 자리도 잡아가고 승진하는 소식들이 들려오는데, 저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거라 한편으로 불안하기도 하다가 한편으로 새롭게 주어진 자유로움에 감사하기도 합니다.
이참에, 그동안 여기저기 조금씩 실험만 해오던 INFJ에게 최적화된 생활을 본격적으로 도입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이라는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곳에 적을 두게 되었고, 또한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고 인구 밀도가 낮은 캐나다로 이사오기도 하였습니다. 거기에다 코로나까지 겹쳐 수업도 조별 미팅도 상담 실습도 상당 부분 온라인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제가 그토록 갈구하던 INFJ의 여백의 시간을 뭔가 트럭째로 배달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처음 2주는 꿈 같은 시간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회사에 마지막 출근을 하고난 바로 다음날, 저는 일부러 정확히 아침 9시에, 원래는 출근해야 할 시간에 동네 카페에 커피를 마시러 갔습니다. 평일에 말입니다. 그 시간이 지금 생각해도 참 꿈만 같았습니다. 저에게 카페인으로 적당히 충전된 아침 시간이야말로 내일 죽어도 좋을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에는 글을 쓸 영감도 얻고, 일상에서 한 발짝 물러서 나의 삶을 되돌아보기도 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다른 어떤 것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히 나 자신과의 연결감을 느끼며 보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시간이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일상의 구조가 없어져 매 순간마다 선택을 해야 하는 생활에 불안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일주일에 3-4일 수업 듣는 시간 외에는 제가 반드시 이 시간에 꼭 어딘가에 있어야 한다는 룰이 전부 사라졌으니까요. 내가 어딘가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버거운 일이었습니다. 이런 버거움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캐나다 사람들과 주로 소통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디든 적당히 맞춰나가던 전략이 필수였던 반면, 이곳 캐나다에서는 자기 색을 확실하게 드러내야만 마음 맞는 친구도 사귈 수 있고 동료나 교수들과 네트워킹도 가능하더군요.
우선 공감 능력과 타인을 배려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모인 상담 대학원에서 만난 동기들, 미래의 동료들과 지내면서 화목함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서로 경쟁하며 비교하고 무리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애쓰는 분위기가 아닌, 서로 격려하고 함께 나아가려는 성향이 매우 강한 사람들만 잔뜩 모아놓고 수업을 하다 보니 마음이 안정되면서 머리가 훨씬 잘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이후에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방전되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내향 성향이 있어 배터리 용량이 애초부터 콩알만한 INFJ에게는 필수 요소이기도 하겠더라구요. 생각해보면,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어떤 이득을 보기 위해서 곁에 두려는 욕심만 버려도, 이런 깨달음은 일찌감치 얻지 않았을까 반성해보기도 합니다.
또한 외부에서 주어진 스케줄이 전부 나가 떨어진 지금, 나만의 정신적, 신체적 리듬에 주파수를 맞추는 훈련이 되어감을 느낍니다. 인간은, 특히 INFJ는, 기계도, 시계도 아닙니다. 산업화 시대에서는 정해진 스케줄이 생산성을 관리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는데, 그런 정해진 스케줄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은 아니었음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초등학교 여름 방학 때 시간표를 짜고 그 시간표에 맞추어서 생활을 못하면 내가 실패자가 된 것 같은 느낌도 이제는 버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연스러운 리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산책하고픈 기분은 매일 아침 하루에 한번씩 돌아오지만, 글을 쓰고픈 기분은 애매하게 5-6일에 한번씩 돌아옵니다. 정말 뇌에 콕콕 들어와주는 책을 읽고픈 마음은 2주에 한번씩 돌아오구요. 친구들과 만남을 가지고 나면 다음 날 하루는 온전히 에너지는 회복하는 데 써야 합니다. 밀도 높은 수업을 3시간 듣고 나면 또 반나절 회복을 해야 하구요.
결국 저는 이러저러한 스케줄로 실험을 해보고 나서, 소위 말하는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시간은 하루에 많아야 2-3시간 정도로 압축된 것 같습니다. 일주일 중 이틀만 하루에 내담자 3-5명을 만나 상담을 진행하는 것 외에는 시간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 지금, 저는 하루에 딱 내가 정한만큼만 일을 하면서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생산성을 보이기도 하고 있구요. 생각해보면, 주 40시간을 근무하더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하루 동안 정말 생산적인 일을 하는 시간도 결국 2-3시간 정도였던 것 같기도 하네요.
저는 INFJ라는 정체성에 맞게 환경을 구축해나가고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가 사는 시대 또한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대감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기술의 발전으로 모두에게 여백의 시간이 많아지는 사회가 도래하고 있으니까요. 무작정 열심히 시간 정해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고 나니, 막연한 자유로움이 아닌 또 다른 류의 압박이 기다리고 있기는 하더라구요. 하지만 내가 선택한 일을, 내가 선택한 시간에, 내가 선택한만큼의 강도로 진행하는 것이 두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또 이 시대를 살아가면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맞닥뜨려야 하는 문제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