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J] INFJ가 나이를 거꾸로 먹는 이유
저는 어렸을 때에는 어른스러웠습니다. 책임감이 강했고, 주어진 일은 묵묵히 열심히 해나갔으며, 다른 아이들처럼 떼를 쓰거나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두꺼운 책을 들고 다니면서 읽었고, 글을 쓰더라도 언제나 심각했습니다. 일기장을 보면 온 세상 걱정을 전부 짊어진 것 같은 느낌이 나는 글들 투성이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점점 아이 같아져 가는 게 느껴집니다. 어렸을 때는 언제나 첫째 같다는 얘기를 많이 듣고, 주위 어른들이 침착하다고 칭찬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하지만 나이 마흔이 넘어가는 지금은 막내냐는 질문을 더 많이 받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진지하게 주변 사람들의 고민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많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냥 잡담하고 농담하고 웃는게 더 편안해졌습니다.
어느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서, 그 이유에 대해 조금이나마 이해를 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내향 직관이 전면에 나서기 때문에, INFJ에게는 언제나 결론이 미리 보인다더군요. 우리는 굳이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그 끝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나는 저런 철 없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지, 라고 내심 생각하고, 굳이 험한 꼴 당하지 않을 수 있게 한발 물러서 있습니다. 시작과 끝을 이미 파악한 INFJ에게 일상은 하찮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겸손을 가르치는 현명한 스승인 것 같습니다. 사회 생활을 시작하고나서부터는 점점 낯선 상황에 놓이는 일이 많아지고, 우리가 꿰뚫어보고 있는 줄 알았던 세상이 알고 보니 그리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점점 커집니다. 내향 직관이 발달하기는 했지만, 그 동안 이미 끝을 본듯한 느낌 때문에 굳이 세상에 발을 담그지 않고 있었던 INFJ에게는 직관을 제대로 살릴 만큼의 경험치, 즉 데이터가 부족하기 때문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거기에다 내향 사고까지 가세하여, 이미 내려진 결론을 또 그럴듯한 모델로 정리하여 가지런히 마음 속에 전시해둡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경기장에 발을 들이지 않고, 관중석에 평생 머문다고 누군가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관중석에만 머무는 사람은 평생 크게 실패하거나 넘어지는 일도 없지만, 그렇다고 크게 배우는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팔짱 끼고 앉아 경기에 대한 그럴 드한 품평을 하는 것 같지만, 정작 이 세상에 그리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알고 보면 아닌거죠. 반면 경기장에 들어선 사람은 심장이 터져라 노력하고,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넘어지고 또 넘어집니다. 하지만 경기장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자신의 경험이 되고 자산이 됩니다. 저는 어렸을 때에는 차분하고 어른스러웠을지는 몰라도, 경기장 안에 들어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뭐든 실제로 일을 하고 있는, 경기장 안에 이미 들어서 있는 사람들을 더욱 높이 평가하고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당장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내게는 이미 결론이 나 있는 것 같은 일에 몰두하는 것 같아 보여도, 저런 사람들이 나중에 큰일을 해낼 사람들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이제는 알기 때문입니다. 큰일이라고 꼭 직장이나 사업 관련된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가족, 자신의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도 경기장 안의 사람들이라고 봅니다. 반면, 관중석에서 들려 오는 비난과 각종 아는 척에 대해서는 점차 흘려 들을 수 있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어차피 경기장 안에서 만날 일도 없는 사람들이니까요.
나이가 들수록 남들의 눈에 보이는 실수가 많아졌습니다.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보다는 아는 것이 없다고 고백하고 다니는 시간도 많아졌구요. 도움을 청하는 횟수도 부쩍 늘었습니다. 그리고 그냥 재밌어서, 그냥 웃겨서, 그냥 좋아서, 그냥 궁금해서 하는 일들이 점차 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주변에서 철이 없어 보인다는 말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외향 감정과 외향 감각을 활용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네요. 특히 외향 감각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난 것이 느껴집니다.
남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무게를 더해가는데, 나이가 들수록 가벼워지는 INFJ는 역시 모순덩어리인 것 같습니다. 풍선처럼 가볍게 이리저리 날아다니더라도, 경기장 안에 발을 활실히 들여놓고 있다면, 주변에서 알아봐주는 동료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