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INFJ들은 참 거창하게 삽니다. 이 지구상에 태어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80년 남짓인데, 내가 꿈꾸는 세상이 저 멀리 지평선 넘어에 있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언제나 미완성이고, 내적 갈등은 또 말할 것도 없죠. 나이 마흔이 넘어 내향 직관이 드디어 제기능을 조금씩 하는 것 같아 신기하기도 하고 이제 막 뭔가 이루어질 것 같은 느낌도 들구요. 결혼 생활도 처음에는 거창하게 생각했었습니다. 아이를 낳아 다음 세대까지 물려줄 가치관을 어떻게 정립할지부터 시작해서, 죽음 이후의 자식의 삶까지도 계획하며 저축 통장도 개설했으니까요.
하지만 일요일 오후에, ISFP인 배우자가 집안 온도를 딱 알맞게 맞추어 놓고, 오후에 볕이 적당히 들도록 블라인드를 조정한 채, 소파에 길게 누워 핸드폰을 들여다 보며 여유롭게 쉬는 것을 보고 있자니, 저도 함께 일상 속으로 돌아옵니다. 5년 후, 10년 후 어디에서 살게 될지 고민하는 INFJ와, 당장 오늘 저녁 메뉴도 고민하기 이르다는 ISFP 배우자의 일상은 이렇게 미래 어느 시점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흐릅니다.
우리 부부는 대화가 많지 않습니다. INFJ와 ISFP의 대화 주제가 겹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먼 미래의 계획이라든가 내향 직관의 결과물에 대해 쉴새 없이 떠들기 좋아하는 저의 말은 ISFP 배우자에게는 캐나다의 길거리에서 만나는 노숙자의 앞뒤가 맞지 않는 한탄 만큼이나 희한하게 들리는 듯합니다. 하지만 제가 알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즐겁다는 사실만큼은 전달되는 듯합니다. ISFP 배우자는, 상대방이 즐겁기만 하다면 만사 오케이. 안심하고 넘어갑니다.
때로는 INFJ가 ISFP 배우자에게 상담을 하기도 합니다. 친구와의 이러저러한 일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데, 그 섬세한 뉘앙스를 전달하기 위해 진땀을 빼며 INFJ는 설명을 합니다. ISFP 배우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중한 자세로 들어줍니다. 그러다가 아주 깔끔하고 현실적인 조언을 해줍니다. "그 친구랑 안 만나면 되지." 현실적인 해결책이 있다면, 굳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ISFP는 간단한 일을 가지고 진땀 빼는 INFJ가 신기하기만 하고, INFJ는 너무 쉽고 뻔한 답을 내주는 ISFP가 웃깁니다.
이렇게 서로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 대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부부 사이가 돈독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부부 간에 소통은 언어를 기반으로 한 대화가 핵심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INFJ스러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주변의 ENFP를 한두명만 확보해놓아도 그런 쪽 욕구는 충족이 되거든요. 하지만 일상 속에서 서로 신뢰를 쌓아 나가는 데에는, INFJ식의 거창한 비젼에 관한 대화는 가치가 없을 수도 있는 것 같아요.
부부 상담 기법 중 가장 권위 있는 가트맨 부부의 상담 훈련 중, 어느 한 부부의 일상을 녹화한 것을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아내가 창밖을 보며, 날씨가 좋다며 감탄을 합니다. 남편은 식탁에 앉아 신문을 들여다보며, 고개도 돌리지 않고, 건성으로 "어"라고 답합니다. 가트맨 부부는 이 부부를 매우 칭찬하더군요. 아내의 감정에 신나게 공감해주기라도 해야 최선을 다하는 남편일 것 같은데, 가트맨 부부는 이 남편이 성실하고, 그리고 수십년에 걸쳐 일관성 있게, 아내의 "관심 구하기" 행동에 응해준 것이 건강한 부부 생활의 기초라고 가르칩니다.
ISFP와 보내는 일상 속에는 그러한 성실성이 분명 자리잡고 있습니다. 좀 현란하지만 어쨌든 상대방을 위해주려는 INFJ와, 성실하고 일관되게 상대를 위해 봉사하는 자세가 되어 있는 ISFP는 일상 속 작은 제스쳐를 통해 신뢰를 쌓아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INFJ가 무슨 말을 하든 어쨌든 응해주는 ISFP가, 가끔 함께 우주 여행을 떠나주는 ENFP보다 든든하기도 하고요. 비젼이 살짝씩 어긋나는데 같은 부분에서 열정을 가지고 있는 타인과의 피곤한 대화보다는, 깔끔하게 현실로 도로 끌고 와주는 ISFP와의 대화가 더 고마울 때도 많고요.
제가 최근에 알게 된 한 만화에서, 가장 이상적인 부부의 조합이란, 한 명은 재미가 없고 (boring) 한 명은 제정신이 아닌 경우 (crazy) 라고 하던데, 그 말이 꼭 우리 부부를 지칭하는 것 같아서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 부부 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결국 일상 속에서 서로 놀리고 웃기는 "재미"입니다. 처음에는 정말 서로 할 얘기가 없어서, 웃기기라도 하자에서 시작된 것 같은데, 결국 우리가 일상을 구축해 나가는데 핵심 역량이 되어 버린 것 같아, 웃지만 든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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