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INFJ로 살면서 가장 답답하고 스스로 실망스러울 때는 아마도 거창한 계획을 가지고 시작한 일을 끝까지 해내지 못할 때인 것 같습니다. 시작할 때는 직관에 기대어 통찰을 얻고 '아하!' 지금 이러이런 일을 해내면 세상을 바꾸겠구나라고 생각까지 들고, 후다닥 계획을 세워나갑니다. 그러다가 하루 이틀, 때로는 한두달 가량 까지도 계획대로 잘 해내다가, 예상치 못했던 장애물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런 장애를 풀어보려고 샛길로 새어나갔다가, 짜증이 쌓이고 점차 의욕이 떨어져, 일이 흐지부지 되는 경우 말이죠. 이런 용두사미식 진행에 세상을 바꿀만한 통찰들이 이제는 한 무더기쯤 쌓여 있습니다.
이 반복되는 과정을 한번 되돌아보니, 마음 아픈 몇 가지 특징들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그런 통찰을 얻고 계획을 세우고 나면, 가장 하고 싶어지는 일이 앞으로 해낼 이 멋진 일들에 대해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입니다. 입부터 근질근질해지는거죠. 저의 경우, 통찰을 얻고 실제로 일을 시작한지 하루 이틀 정도 지났을 때에 이 욕구가 가장 강하게 드는데, 이런 성향이 정말 여러 모로 안 좋더라구요. 우선 누군가에게 나의 계획을 알리는 일은, 실제로 그 일을 하기 위한 외로운 작업보다는 훨씬 즐거운 일이고, 무엇보다 그 일을 차근차근 진행했을 때의 성취감을 대체하기도 한다는 무서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직 하지도 않은 일을 마치 이미 해낸 것 같은 착각을 스스로 들게 만드는거죠.
또한, 애초의 계획이 거창하면 할수록, 시작 전의 기쁨은 비례해서 더욱 커지지만, 막상 실천에 들어가고 나면 과부하가 오는 시점도 빨라지더라구요. 생각해보면, 애초의 계획이 거창하면 할수록, 해내야 할 일, 풀어내야 할 부분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만큼 계획에 허점도 많다는 것이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큰 그림을 그릴수록,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은 가정이 그만큼 많이 동원되어야 하나보더라구요. 내가 가정했던 사실들이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을 때, 처음의 비젼은 신기루처럼 증발해 버리는 경험을 생각보다 자주 해온 것 같습니다.
행동해야만 내가 그리는 현실을 지어낼 수 있는데, 이렇게 자꾸 행동이 흐지부지 되지 않기 위해 몇 가지 시도를 해 보았습니다. 우선 가장 효과가 덜한 것이 무식하게 의지를 가지고 밀어부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이 젊었을 때는 어느 정도 먹히기도 했던 것 같은데,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일수록 이런 방식으로 인한 에너지 누수가 점차 짜증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신 생각한 것이, 해내고자 하는 일을 해내기 위한 작은 습관들을 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 매주 같은 날에 무조건 계획 실천을 위한 행동을 해내는 것. 그런데 이 또한 그날그날의 체력과 상황에 따라 자꾸만 변하는 것 같고, 나의 계획을 실천하기 위한 다양하고 복잡한 사항들과 습관화할 수 있는 단순한 사항들 간에 괴리가 분명 있더라구요.
요새 들어 노력을 기울이는 부분 중 하나는 선택과 집중입니다. 우선 하고 싶은 일들을 전부 후다닥 목록을 정해 나열하고, 파레토 법칙에 따라 그중에서 80%는 삭제해 버립니다. 목록이 대부분은 희망 사항에 불과하지, 막상 최초의 신남이 지나 버리고 나면 금새 시들해질 일들이거든요. 그러면 남은 한두 가지를 일관성 있게 해낼 수 있는 계획을 세우는 일이 수월해지더라구요. 계획을 세우는 일은 오히려 너무 단순해서 이때부터 솔직히 흥미가 떨어질 정도일 때 그 일을 끝까지 해낼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 같긴 해요. 그런데 알고 보면 일관성 있게 일을 해내는 것이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백배는 힘이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계획을 세우는 일은 자연스럽게 다가오지만, 실천하는 것, 그것도 한두번이 아닌 꾸준히 몇달을, 몇년을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게임이라는 사실을 점차 깨닫습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 레고로 공장 놀이를 즐겨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컨베이어 벨트를 만들고, 재료를 하나하나 추가하여 똑같은 완성품을 여러개 만들어 내는 것이 그렇게도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레고 블럭을 컨베이어 벨트에 올리고, 부품을 추가하여, 다음 단계로 옮겨내는 일이 전부 저의 노력이었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그 어린 시절에도 자동화를 이용해 최소한의 노력으로 많은 결과를 가져오고 싶었던 희한한 욕구가 있는 아이였다는 사실이. 어른이 된 이후, 저는 아직까지도 컨베이어 벨트만 작동하게 만든다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다는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고, 결국 내가 스스로 레고 블럭을 하나하나 옮겨야만 한다는 운명이라는 것을 조금씩 인정하는 단계에 다다른 것 같네요.
통찰을 바탕으로 계획을 세우는 일은 INFJ에게는 본능적인 일인 것 같지만, 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일들의 80%를 떨쳐내고, 20%에만 꾸준히 집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인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을 어떻게든 쉽게 해보려고 그동안 머리를 엄청 굴려 봤지만, 실제 결과물을 보고 싶다면 뛰어들어 힘들게 일하는 것말고는 아직까지는 방법이 보이지 않는군요. 그러다가 노력이 시들해지는 것이 느껴지면 조금 동안 힘을 빼고 있다가,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요. 이 방법이 맞는지 아닌지에 대해 쉴새 없이 점검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것 같고, 사람들에게 내가 하는 멋진 일에 대해 함구하는 것이 대체로 일의 진행에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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