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J로 살아온 세월이 40년이 넘어가는 요즘, 마음이 많이 평온해졌습니다. 그간의 현실적이고 집중적인 노력을 통해 직업도 바꾸고 나라도 바꾸어 가며, 새로운 관계를 쌓기도 하면서 원하는 일상을 손에 거머쥐었다는 뿌듯함에, 종종 그저 감사한 마음에 빠져 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변치 않는 것이 있더군요. 학교를 가든, 직장을 가든, 내담자로 만나든, SJ형들은 어디에나 있는 것 같고, 그분들과 잘 지내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특별한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저는 SJ형을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정말 좋아하고 존경하는 친구들 중 몇 명은 전형적인 SJ형입니다. 다만 INFJ로써 SJ형과 가깝게 지내다 보면 느끼는 묘한 불편함이 여전히 가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최근에 다시 느낄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만의 룰에 부합하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 생기는 갈등들, 서로 척이면 척하고 알아듣는 일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답답한 순간들, 작지만 오묘하게 불편해지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SJ형들이 사회를 대표하여 나를 비난하고 옥죄려 든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조직이나 모임이 되었든 항상 운영진이 되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SJ형들은 알 수 없는 룰들을 들고 와 저에게 강요하는 듯한,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은 피해 망상적인 생각에 빠졌던 적도 있구요.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참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아직 나의 자아가 단단하지 않아, 조금 다름이 강요와 압박으로 다가왔던 것 같네요.
나의 일, 나의 삶, 나의 관계가 예전에 비해 훨씬 가지런히 정립된 지금, 조금은 누그러진 마음으로 주변의 SJ형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선 SJ형들은 INFJ에 비해 속이 말랑말랑합니다. 알고 보면 상처도 잘 받고, 소심하기도 하고, 작은 일에 전전긍긍하는 성향이 있고, 그로 인한 불안감을 상쇄하기 위해 주변인들에게 자신만의 규범을 '적용'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나 자신이 항상 상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직관 능력이 탑재되어 있지 않은 사람 입장에서 바라봤을 때에는 자유롭고 기복이 있고, 대체로 예측이 어려운 INFJ가 불안하기도 했을 겁니다. 자신의 여린 마음을 지키기 위해 규범을 열심히 지키는 사람은, 타인이 그런 규범을 (일부러가 아니라 정말 몰라서) 안 지켰을 때 느끼는 경계심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도 같네요.
INFJ는 의외로 순간순간의 감정에는 휘둘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내면 세계의 비중이 큰 사람일수록, 외부의 일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싶니다. 우리는 속으로는 소용돌이 치고 혼자 멍들지만, 외부의 일에는 꽤나 태연한 경우도 많지 않나요. 스스로 건강한 내면 세계를 구축한 INFJ는 작은 일은 무심코 넘기기 때문에 자칫하면 무심해 보일 수도 있겠더라구요. 반면 현실 세계, 외부 세계와의 연결감이 확실한 SJ형은 외부의 일에 그때그때, 성실하게 매번 반응을 합니다. 감정이 복받칠 때는 흘러 넘치면서 때로는 큰 일도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INFJ가 참 이상해 보이겠죠.
SJ형과의 관계에서는 일관성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모든 룰을 따르는 건 INFJ로써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INFJ가 스스로 고안해낸 룰들은 일관성 있게 지킬 수는 있으니깐요. 직장에서든, 친구 관계에서든, 변동 사항이 생겼을 때 유연하게 그때그때 대처하는 P형이나 그 변동 사항 이면의 원리를 캐치해내는 N형들과는 달리, SJ형들은 많이 당황하는 편이고, 이 당황스러움이 바로 자기 방어의 일환으로 상대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질 때 주로 갈등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나만의 일관성 있는 행동이나 말을 전하는 게 좋더라구요. 예를 들어, 제가 좋아하는 SJ형 동네 친구에게는 일주일에 한번, 나의 기분과는 상관 없이, 같은 날에 언제나 산책을 제안합니다. 같은 클리닉에 근무하는 SJ형 동료에게는 언제나 클리닉에 도착하면 무조건 인사를 건넵니다.
특히 소심한 SJ형에게는 따뜻함을 전달하는 것이 정말 효과가 있더군요. 너의 규범을 전부 지킬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꾸준히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SJ형의 규범에 대한 요구는 많이 줄어드는 걸 경험한 적이 몇번 있습니다. 그들이 규범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자신의 여린 마음을 지키기 위함이라면, 나는 그 여린 마음을 직접 어루만져 줌으로써 규범을 지켜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트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케어를 받지 못할거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에 가장 융통성이 없어지는 법이니까요.
이 글을 쓰면서 마음이 많이 누그러지기는 하네요. 결국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서로의 연약하고 여린 부분들을 어루만져 줄 수도 있다면 충분히 좋은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며, 지금까지 만나왔고 앞으로도 많이 만나게 될 SJ형들과 잘 지내보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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