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J

[INFJ의 ISFP 관찰기] 고양이와 내향 감정

멜리비 2019. 12. 14. 09:38

ISFP는 대체로 밝고 천진한 성격입니다. 언제나 급하게 서두르는 경우가 없고,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말도 조곤조곤 조심스럽게 합니다. INFJ는 하루에도 내적으로 절망과 극한의 긍정 사이를 수시로 넘나들지만, ISFP는 일관성이 있습니다. INFJ와는 달리, ISFJ는 기분이 안 좋으면 반드시 그에 1:1로 상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배가 고프다, 잠을 푹 못 잤다 등등). 그렇다고 단순한 성격이라고 얕보지는 않습니다. 3차 기능으로 내향 직관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주위 사람들에 대해 날카롭게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종종 놀라곤 합니다. 때로는 득도 수준의 현명함을 선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ISFP는 고양이를 정말 좋아합니다. 다른 동물도 전부 좋아하지만, 특히 고양이만 보면 바로 눈에서 분홍빛 하트가 뚝뚝 떨어집니다. 우리 동네에는 길냥이들이 많은데, ISFP는 길 가다 길냥이만 보면 꼭 멈춰서서 한번 불러봅니다. 이에 길냥이들은 본체만체 먼산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마저도 싱글벙글 좋다며 굳이 또 다가가 봅니다. 하루는 동네 슈퍼에 갔는데 애완동물 사료 코너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더군요. 고양이가 어떤 맛을 좋아할지 모르겠다며 심각해져 있길래, 대신 가격이 가장 싼걸로 골라줬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집에서 강아지만 키워서 그런지, 집에 들어오면 격하게 환영 세레모니를 해주고 쉴새 없이 놀아달라고 졸졸 쫓아다니다가 결국 발밑에 잠드는 것에만 익숙해서, 갑자기 고양이를 대하면 낯섭니다. 고양이는 참 어이 없는 동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새침한 것 같으면서도, 알고 보면 아무 생각이 없는 듯도 하고, 매번 못본체 하다가 가끔 와서 애교 부리는 것에 감동 받는 제 자신도 어이 없습니다. 암튼 참 낯선 매력의 동물입니다.

저는 강아지는 외향 감정을, 고양이는 내향 감정을 나타내는 동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아지의 관심은 온통 주인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산책을 나갈 기미는 안 보이는지, 놀아주지는 않을런지 언제나 파악 중이며, 맛있는 음식을 조금이라도 얻어 먹기 위해 어떠한 애교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반면 고양이는 온전히 자신의 욕구에만 주파수가 맞춰져 있는 것 같습니다. 남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내가 좋으면 좋고 싫으면 그만, 이런 느낌으로요.

외향 감정을 주기능이나 부기능으로 두는 사람 (ENFP/ENFJ/ISFJ)과 함께 밥을 먹으러 갈 때에는 서로 무엇이 먹고 싶은지 알아내기 바쁩니다. 난 아무거나 괜찮은데, 넌 먹고 싶은거 없니? 반면, 내향 감정을 주기능 삼는 (ISFP/INFP/INTP) 친구와 밥을 먹으러 가면서 먹고 싶은게 무엇인지 물으면, 이들은 나의 의견을 되묻는 대신 조용히 내면에 집중을 하며 잠시 침묵한 뒤, 오늘은 김밥 먹고 싶어, 라고 콕 찝어 말합니다. 아주 가끔, INFJ인 내가 정말정말 먹고 싶은게 있을 때 의견을 말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난 부대찌개가 어제부터 너무 먹고 싶었어, 라고 말이죠. 이때 내향 감정인들은 다시 한번 조용히 내면에 초점을 맞추며 잠시 침묵합니다. 그런 후, 난 아냐,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들이 그렇게 콕 찝어 말한 메뉴를 먹으러 가면, 그게 또 그렇게도 맛있습니다. 고양이만큼이나 오묘한 매력의 내향 감정인들입니다.

저도 가끔 내면에 집중하는 것을 연습합니다. 매번 타인의 기대, 타인의 욕구를 파악하려 머리 속으로 복잡하게 이 시나리오 저 시나리오 돌리기보다는, 잠시 침묵하고, 정말 내 안에서, 이 순간, 반드시, 먹고 싶은 것이 있는지 질문해 봅니다. 그런데 잘 안됩니다. 머리 속에는 온통, 상대가 지난번에 좋아했다고 말한 음식이 뭐였는지, 식당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불편하지는 않을지, 금액대가 과하지는 않은지, 상대가 매운 것을 요새 잘 못 먹는다 했는데 이제는 괜찮은지와 같은 생각들이 돌아다닙니다. 어찌 보면 INFJ는 타인의 욕구와 자신의 욕구를 구분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혼자인 것이 편할 때도 있습니다. 그냥 먹고 싶은 것을 먹으러 가는 게 가능한 때는 혼자일 때 뿐인 것 같습니다.

외향 감정인이 내향 감정인과 지내다 보면 상처 받을 일이 좀 많습니다. 강아지가 고양이와 지내는 것만큼이나 서로 다른 존재들이라 그런 듯합니다. 외향 감정인의 관점에서 보면 내향 감정인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존재로 비춰질 수 있고, 내향 감정인이 보기에 외향 감정인은 매번 마음에도 없는 소리하며 눈치나 보는 가식적인 사람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욕구에 충실하기 때문에 진짜 맛있는 음식을 잘 가려내는 내향 감정인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즐겁습니다. 음식 뿐만 아니라, 여행, 옷, 음악 등등 삶의 모든 요소에 대해서도, 이들은 내면의 목소리에 충실한 듯합니다. 그리고 내향 감정인들은 이런 제가 조금 귀찮기는 해도 또 없으면 아쉬워하더군요.

타인의 욕구에는 민감하지만 자신의 욕구에 대해서는 의외로 무감각한 외향 감정인인이 내향 감정인과 함께 지내다 보면, 삶을 진짜로 맛보며 지낼 수 있게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개인차는 있겠지만요. 옥수수 한 냄비 가득 쪄놓고서 세상 맛있게 먹고 있는 것을 보거나, 그저 마음에 드는 음악을 들으며 주말 오후를 한가로이 보내고 있는 것을 보면, INFJ인 저도 잠시 걱정을 내려놓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고 경험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INFJ에게는 의외로 어려운 형태의 행복인 것 같아, 그만큼 소중하고 감사한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