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살다보면 불안과 우울에 시달리게 마련입니다. 불편한 기분, 힘빠지는 생각들, 마냥 피하고만 싶은 현실이 때로는 내 한몸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짓누르기도 하고, 때로는 가벼운 봄비처럼 잠시 비를 뿌리고 지나가기도 합니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갖춰야 할 것을 다 갖춘 것 같은 사람일지라도, 알고 보면 종종 그런 감정이 찾아온다고도 하더군요.
저는 20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 시절은 저에게 불안과 우울에 짓눌려 지내던 시기이였거든요. 물론 그렇다고 더 나아지기 위해, 나에게 더 맞는 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 부분은 사실 기억에 잘 남지 않습니다. 좌절감과 무력함에 대한 기억만이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주변에서 20대가 인생에서 최고로 빛나는 시기다, 젊음이 최고다, 자꾸 말하니까 더욱 암울했습니다. 지금이 최고의 시기라면 30대 이후로는 삶이 하향길로 접어든단 말입니까.
살아보니 30대는 20대보다 한 50배 낫더군요. 우선 INFJ인 내게 맞는 방식과 페이스가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가끔은 버벅버벅 길을 잘못 들기도 하지만, 이제는 이 모든 것이 더 나은 방법을 찾아내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방법에 대해 의문을 품기는 해도, 나라는 인간의 가치에 대한 의문은 더이상 품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괜찮다는 사실, 그리고 그 누구도 괜찮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마음 속 깊이 실감합니다. 나는 괜찮은데, 잠시 길을 잘못 들었거나, 방법이 잘못되었거나, 상대방에게 나의 생각을 전달하는 기술이 잘못되었거나, 등등인거죠. 나는 괜찮은데 말입니다.
불안과 우울이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이 내가 실패했다는 확증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우울한 기분이 들면 역시 나는 안돼, 다 소용없어,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는 가끔 불안이나 우울이 찾아오면, 오늘은 날씨가 조금 흐리구나, 정도로 한발 물러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할까요. 날씨가 잠시 흐려진거지, 하늘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거든요. 아무리 흐린 날이라도, 비행기 타고 올라가면 그 위에 푸른 하늘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게 된겁니다.
불안과 우울은 어찌보면 나의 객관적인 성질이나, 주변 환경과는 의외로 무관한 것 같습니다. 인간이 그리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성,” 즉 전두엽을 중심으로 발달한 상황을 합리적으로 따져보고 자신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은 아주 최근에 탑재된 신기술입니다. 그 이전에 수백만년 동안 인류는, 아프리카 초원이나 동굴 속에서 살아가던 시절부터, 상황이 좋든 나쁘든 언제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변을 경계하도록 진화해 왔습니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오늘 하루 멧돼지 한 마리 잡아 먹고는 기분 좋다고 마냥 늘어져 잠들어 버린다면 사자밥 되기 딱 좋은 상황이었으니까요. 멧돼지를 맛나게 먹고 나서도, 신경 날카롭게 주변을 살피던 우리 조상들만이 살아남아 그들의 불안 유전자가 우리에게까지 전달된겁니다. 우리는 진화를 통해 본능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습니다 (참고)
이렇게 수백만년 동안 프로그래밍된 본능에 비하면 이성의 목소리는 모기 목소리 정도에 해당될 걸로 저는 추정합니다. 그래서 불안과 우울이 찾아오면, 특히 아직 자아가 덜 형성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온갖 비이성적인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나는 무엇을 해도 안된다든가, 나는 가치 없는 인간이라든가, 나를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다든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얘기들이지만, 감정과 본능은 실로 그 위력이 대단합니다. 잠시 날이 흐려진 것 뿐인데 세상 종말이 온 것 같은 착각을 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렇게 불안과 우울에 사로잡혀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버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20대에 느끼는 문제의 한 90%는 30대 되면 기억조차 나지 않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들이거든요. 그리고 그 당시 내가 주저 앉아 버렸다면, 오늘 느끼는 행복들을 전부 포기하는 셈이었겠구나, 또한 느끼며 종종 간담이 서늘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8%는 기술의 문제인 듯합니다. INFJ에게는 남들의 방식이 맞지 않기 때문에, 나만의 방식을 발견해내기 위한 노력을 조금 더 기울여야 합니다. A에서 B지점까지 가야만 하는데, 1번 방식으로 했더니 안돼더라, 고로 나는 가치 없는 인간이다(?) 로 이어가지 말고, 1번 방식이 안 먹히니 2번 방식을 시도해보고, 그것도 아니라면 3번 방식을 시도해보는, 어찌 보면 어린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는 것과 별다를 게 없는 과정이죠. 옆에서 보면 조금 의아해할 수는 있겠지만, 남들이 조금 웃으면 뭐 어때요. 나는 내 갈 길 찾아 가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2%는 실제로 바뀌지 않는 것들인데, 받아들이면 그만입니다. 누구에게나 불안과 우울이 찾아오는 날이 있다는 것, 누구나 성장 시기가 다르고 인생은 백미터 달리기가 아니라는 사실 같은 것들처럼요.
이제 저에게 우울과 불안은 나의 가치를 결정 짓는 존재들이기 보다는, 오랜 친구와 같은 느낌입니다. 마치 한때 매일매일 만났었는데 최근 들어 연락이 뜸해진 친구와 같이요. 가끔 그렇게 뜬금없이 찾아오면 그저 가만히 마주보며 함께 시간을 보내면 그만입니다. 굳이 정색하며 쫓아보낼 필요도 없구요, 그냥 그렇게 마주하다가 알아서 떠날 때가 되면 조용히 보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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