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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누엘 칸트의 하루 일과만 본다면, 그를 세상에서 가장 따분한 사람으로 볼수도, 혹은 기계만치 효율적인 사람이라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40년 넘도록, 매일 아침 5시에 기상하여 정확히 3시간 동안 글을 썼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 평생 같은 대학에서 정확히 4시간 동안 강의를 한 후, 매일 같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오후에는 같은 공원에서, 같은 길을 따라 긴 산책을 하고서, 같은 시간에 귀가했다고 합니다.
칸트는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라는 도시에서 평생 살았습니다. 농담이 아니구요, 그는 이 도시를 한번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쾨니히스베르에서 한 시간이면 닿을 거리에 바닷가가 있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바다를 본적이 없었답니다.
칸트의 일상은 효율성 그 자체였습니다. 워낙 규칙적인 생활을 했던 터라, 칸트의 이웃들은 아침에 그가 집을 나서는 시간을 기준으로 시계를 맞출 정도였다고 합니다. 산책하기 위해 정확히 오후 3:30분에 집을 나선 그는, 매일 같은 친구와 저녁 식사를 하고서, 집에 돌아와 남은 일을 마치고 10시 정각에 취침하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였습니다.
오늘날 이런 사람을 주변에서 본다면, 괴짜라고 비웃겠죠. 하지만 칸트는 근대 역사상 가중 중요한 사상가였습니다. 방 두 칸 짜리 자그마한 아파트에서 생활하면서도, 동시대의 어떤 왕이나 군대보다도 세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개인의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칸트의 덕을 본겁니다. 그는 세계 평화를 가져올 범세계적 지도 체제를 처음으로 생각해낸 사람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칸트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상에서 영감을 받아 상대성의 원리를 발견했다고 하네요. 나아가 동물에게도 권리가 있을 수 있다고 처음으로 주장하기도 했고, 미학을 창시했다고도 보며, 몇 백장의 글로 200년간 이어져온 철학 논쟁에 종결부를 찍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서양 문명의 근간이 된 고대 그리스의 도덕 철학을 뒤집어 엎었습니다.
그는, 누가 봐도, 지식인계의 지존이었음을 인정할 겁니다. 칸트의 사상, 특히 도덕에 관해 전세계 대학에서 여전히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칸트에 대해, 바로 제가, 오늘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칸트의 도덕 철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왜 중요한지에 대해 말합니다.
물론, 당신은 이미 속으로 짜증내고 있을겁니다: 마크 맨슨 네가 도덕 철학이라니, 왠일이래? 그런거 누가 신경 쓴다고, 웃긴 고양이 사진이나 어서 좀 올려봐.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거 다 압니다.
방금 당신이 속으로 한 생각, “그런거 누가 신경 쓴다고,” 이 말이 바로 도덕 철학에서 하는 기본 질문입니다. 누가 그런거 신경 쓰냐고 물을 때에는, 우리는 바로 대상의 가치에 대해 묻고 있는 거죠. 이 문제에 대해 시간을 내어 계속 읽어 나갈 가치가 있는건지? 웃긴 고양이 사진이 그래도 좀 더 낫지는 않을런지? 이런 식으로 대상의 가치에 관해 질문할 때마다, 바로 도덕 철학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겁니다.
도덕 철학이란, 쉽게 말해 가치관을 정립하는 기준입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을 따지고 나면, 이는 모든 결정과 행동과 신념의 기반이 됩니다. 따라서 도덕 철학은 우리 삶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겁니다. 자, 이해가 되었으면 다음으로 넘어갈게요.
칸트의 도덕 철학은 언뜻 보아 비상식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독특합니다. 무엇이든 선하려면, 우선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기본 사상 중 하나였습니다. 달리 말해, 어떤 상황에서는 선한 행동이 상황이 바뀌었다고 해서 악한 행동으로 바뀐다면, 그 행동은 애초부터 올바르지 않은 행동이었다고 보는 겁니다. 끝. 가령, 거짓말은 악하다는 원칙을 정했는데, 특별한 상황에서는 거짓말이 허용된다고 주장한다면, 거짓말이 악하다는 것은 도덕 원칙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겁니다.
칸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용되는 보편적인 도덕 원리를 멋지게 “정언 명령”이라 불렀습니다. 맥락과 상황에 관계 없이, 모든 인간에게 예외없이 적용되는 도덕 원리가 바로 정언 명령입니다.
멋지지 않나요? 아니면, 머리가 조금씩 아파오기 시작하나요? 감자튀김 한 봉지 흡입하고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보편적인 도덕 원리 찾는게 아무대로 쉽운 일은 아니겠죠. 하지만 우리 칸트는, 이 문제에 관해 끈질기게 파고 들었습니다. 보편적인 원리를 발견하기 위해 여러 번 시도를 했는데, 대부분 동료들의 반박으로 금새 매장 당했지만, 그 중 일부가 오늘날까지 인정 받는 도덕 원리로 자리 잡아, 그 타당성을 인정 받고 있습니다.
결국 인정 받은 도덕 원리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그 동안 읽은 모든 철학, 심리학, 그리고 그 외의 모든 학문에 관한 글을 통틀어, 칸트의 이 하나의 도덕 원리는 지금까지 접한 어떠한 글귀보다도 강렬했답니다. 그 힘이 실로 대단하여, 그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지 않은 사람은 이미 없다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칸트는 이 문장 하나로, 우리가 도덕에 관해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바와, 그 전제까지도, 모두 통합해버립니다. 이 도덕 원리야말로, 모든 상황에서 우리의 행동 방안을 제시하고, 그 이유에 대해서도 명쾌한 답을 줄 수 있습니다.
바람 잡는 건 여기까지만 하고, 그 하나 뿐인 도덕 원리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도덕 원리의 제왕 (^^;;)
“당신의 모든 행동을 통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만 대하도록 한다.”
훔.
부연 설명 할게요.
칸튼는 이성을 아주 중시했습니다. 이성이 중요한 이유는, 이성을 가진 우리 인간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선택하고 결정을 내리며, 그 결과에 대해 도덕적인 책임을 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은 수학 잘하는거랑은 상관 없구요.
인간만이 의식을 가진 존재인 겁니다.
칸트가 보기에,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구분되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 인간은 의식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은 아주 특별한 능력이었습니다. 아주, 아주 많이 특별했어요. 전 우주에서 의식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우리 인간 뿐이기 때문에, 그런 의식을 아주 소중히 여겨야만 합니다. 이렇듯 소중한 의식을, 바로 도덕성의 근간으로 삼는 겁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칸트는 “만일 이성이 없다면, 온 우주는 의미가 없는, 소용 없고 쓸모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인간에게서 지적인 능력과, 그 능력을 활용할 자유를 떼어 버리고 나면, 인간은 돌멩이와도 구분되지 않는, 그런 존재로 전락한다고 그는 보았습니다.
따라서, 칸트의 도덕 원리는 각 개인의 이성과 의식을 보호하고 활용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럼 개인의 이성과 의식을 보호하는거, 그거 어떻게 하는건가요?
이미 저 위에서 언급한 도덕 원리의 제왕, 즉 칸트의 규칙을 따르는 겁니다.
이쯤에서, 칸트의 규칙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 조금 쉽게 풀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대해서는 절대 안 되며, 오직 목적으로만 대해야 한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이미 이해가 된 사람은 아래 회색 부분을 건너뛰어도 좋구요, 아직 조금 헷갈리는 사람은 아래 회색 칠한 부분 발 한번 읽어보세요.
수단과 목적이 아직 좀 헷갈리는 사람들을 위한 회색 부분
당신이 지금 배가 무지 고프다고 가정합시다. 당장 짜장면 한 그릇이 먹고 싶어 못 견딜 지경입니다. 그래서 냉장고에 붙여둔 짜장면 배달집 전단지를 찾아, 전화기를 들고 전화를 해서, 주문을 합니다.
이 상황에서, 짜장면을 먹는 것이 당신의 “목적”입니다. 그 이외의 모든 행동, 전단지를 찾고 전화를 들고 주문을 하는 행위는 전부 짜장면을 먹기 위해 하는 행동이므로, “수단”입니다. 따라서, “수단”이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는 모든 행동을 일컫습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다면, 당신의 목적은 그들의 근황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출근하기 위해 술자리에서 일찍 빠져나온다면, 당신의 목적은 일찍 출근하는 것, 수단은 술자리에서 일찍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수단은 조건적으로 하는 행동입니다. 귀찮게 전단지를 찾아 전화를 걸고 싶지 않겠죠. 하지만 짜장면은 무지 먹고 싶구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전단지를 찾아 전화를 거는 일입니다.
반면, 목적은 그 자체가 가치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과 행위를 결정 짓는 결정적 동기입니다. 사실 제가 짜장면이 먹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아내가 짜장면이 먹고 싶었던 것이라면, 짜장면은 다시 수단이 됩니다. 제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한 수단이 되는거죠. 그리고 제가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려는 이유가 결국, 오늘 저녁에 잠자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면, 이제 아내의 행복은 수단으로 전락하며, 목적은 오늘 저녁의 잠자리입니다.
마지막 말에 불쾌해하실 분들 있을 겁니다. 바로 그런 경우를 칸트가 막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의 주장, 아니 그의 규칙은 곧 모든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만 대하게 함으로써 이런 비도덕적인 경우를 막기 위함입니다.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짜장면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괜찮아요. 하지만 아내와 잠자리를 하기 위해 아내를 수단으로 대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괜찮지 않아요. 칸트의 말에 따르면요.
칸트의 규칙을 여러 상식적인 상황에 대입하여, 맞는지 검증해 봅시다.
거짓말이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타인을 의식적으로 속이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거짓말을 당하는 상대방은 곧 당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며, 이는 칸트의 기준으로 비도덕적입니다.
외도를 하는 것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의식 있는 존재의 기대를 일부러 저버리는 것입니다. 당신이 약속을 기반으로 형성된 타인의 기대를 수단 삼아 당신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므로, 비도덕적입니다.
폭력도 마찬가지, 다른 사람을 정치적, 혹은 개인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아주 몹쓸 짓이죠.
보다시피 칸트의 규칙은 도덕 이론이 갖추어야 할 모든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칸트의 규칙은 상식적인 도덕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습니다. 칸트의 규칙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옳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적용할 수 있는, 규칙의 제왕인 것 같습니다.
아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칸트의 규칙을 실생활에 도덕적으로 적용하기
지금부터 제가 예를 들 경우 이외에도 수많은 예가 존재할 겁니다. 이중 일부는 칸트가 직접 자신의 글에서 언급한 것들이지만, 일부는 그의 사상을 바탕으로 저의 가치관을 다시 적용하여 도출한 것들입니다. 단언컨대, 아래 나열된 경우를 읽고 나면, 당신도 칸트의 하나의 규칙이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될 수 있음을 느끼고 감탄할 것입니다.
게으름 - 우리 모두 조금씩 게으르죠? 저도 게으릅니다. 바로 인정할게요. 저도 종종 게으른 제 자신이 부끄럽기도 해요. 지금 당장 조금 편하자고 게으름을 피우면 나중에 언젠가 고생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의 편의를 선택합니다.
칸트는 게으름을 부도덕하다고 보았는데, 그 이유는 나중에 고생을 하기 때문 이 아니었답니다. 칸트의 기준에서 보면 이런 설명은 좀 부족하죠.
칸트가 보기에,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최선을 다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혹은 사회에 기여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아뇨, 칸트는 더 멀리 나아갔습니다. 사람이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는, 그 길만이 자기 자신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대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침대에 뒹굴뒹굴하며 인스타그램만 한 시간째 들여다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당신은, 자신의 의식과 관심을 순간의 쾌락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겁니다. 자신의 의식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대신, 잠시 동안 감정을 자극하는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겁니다.
칸트에 의하면 이런 행위는 비도덕적입니다. 당신은 스스로 해치고 있으니까요.
중독 – 이제와서 믿을지 모르겠지만, 칸트가 아예 놀 줄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점심 때 와인을 한 잔씩 즐기기도 했고, 담배도 피웠다고 합니다 (비록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만, 딱 한 파이프 분만이긴 했지만요).
칸트는 노는 것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현실 도피를 위한 놀이는 반대했습니다. 그는 술을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인생의 현실을 외면하고 도망치려 하는 것은 부도덕하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의 이성과 자유를 수단 삼아 자신이 아닌 다른 목적, 즉 취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칸트는 문제는 언제나 직시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살면서 고통은 필요악이라고 보았지요. 일반적으로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이 나쁘다고 하는 이유는, 가족을 비롯한 주변인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죠. 하지만 칸트가 보기에, 쾌락만을 좇는 행위는 우선 자신에게 비도덕적일 뿐, 주변인에게 돌아가는 피해는 그저 부수적인 효과에 불과하다고 봤습니다. 현실을 도피한다는 것은 자신의 이성과 의식을 직시하는데 실패하는 것이고, 결국 자신의 가능성을 전부 실현하지 못하게 만드는, 거짓말이나 외도와 맞먹는 도둑 행위라고 보았습니다. 칸트의 신념대로라면, 남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나, 모두 똑같이 부도덕한 행위입니다.
아첨하며 남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것 – 물론, 남에게 아첨하는 것이 좋은 전략이 아닌 건 알지만, 부도덕하다니, 말이 좀 심하죠? 사람들에게 잘 대해주는 것이 뭐 그리 나쁜 일이라고, 도덕까지 들먹이며 비난해야만 하나요?
생각 좀 해봅시다.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쓰고 아첨하려면, 자신의 진짜 생각과 감정과는 다른 말과 행동을 해야만 합니다. 바로 여기서 당신은 이미 자신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더 나쁜건, 당신이 말과 행동을 조금씩 바꾸어 타인이 자신을 좋게 보게 하려는 것은 또한 그들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아, 당신이 원하는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해 그들을 조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칸트가 보기에 이는 분명 부도덕한 일입니다 (이 셔츠가 잘 어울린다고 말하다니, 당신 아주 부도덕하군요!!). 저는 이전 포스트에서 이미, 아첨하고 남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것이 결국 인간 관계에 독이 된다고 여러 번 주장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칸트는 한발짝 더 나간거죠. 칸트가 좀 하드코어에요.
조종과 강제 – 당신이 꼭 거짓을 고하고 있지 않더라도, 타인으로부터 무언가를 얻기 위해, 진실되지 않은 태도와 말로 그들을 대하고 있다면, 이것 또한 부도덕합니다. 칸트는 언제나 예외없이 솔직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두 사람 간에 건강한 소통이 이루어지려면, 서로 반드시 솔직해야 한다고 보았거든요. 당시 이런 생각은 아주 획기적인 것이었고,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이런 류의 소통을 힘겨워합니다.
제 기준으로, 오늘날 언제나 백프로 솔직해야만 하는 분야가 둘 있는데, 제 생각에 칸트도 동의했을 거라 확신합니다.
첫째는 섹스와 연애입니다. 칸트의 규칙에 의하면, 서로의 모든 사실에 대해 이실 직고한 후 서로 승낙을 한 상태가 아니라면, 어떠한 관계도 부도덕합니다. 오늘날 아주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기도 하는 이슈인데요, 알고 보면 그리 복잡한 문제도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서로를 존중하자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데이트 신청을 연속 20번 하는 것을 존중이라 보기도 하는데, 이건 존중이 아닙니다. 당신이 할 일은 그저, 당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알리고, 상대의 감정이 어떠한지 문의하고, 상대의 답변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 뿐입니다.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칸트의 도덕 이론에서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의식이 있는 생명체는 예외 없이 존중해야만 하는, 근원적인 존엄성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칸트의 관점에서, 승낙하는 일은 존중을 표시하는 행위였던 겁니다. 서로 간에 승낙 없이 이어지는 행위는 결국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설명하고 나니, 칸트가 성난 꼰대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하지만 승낙과 관련한 문제는 우리가 맺는 모든 인간 관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현대 사회에서 한 가지 문제가 되는 분야가 바로 영업과 마케팅입니다. 거의 모든 마케팅 전략은 사람을 목적이 아닌,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대하는데서 출발합니다. 칸트는 자본주의와 빈부 격차의 도덕성에 관해 평생 고민했습니다. 그는 어느 정도 타인을 조종하거나 강제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부자가 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 자체에 대해 상당한 의문을 품었습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반대했던 건 아닌데 (당시 공산주의는 아직 없었습니다), 동시대 어마어마한 빈부 격차는 그를 아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큰 부를 쌓은 사람은 배고픈 대중에게 부를 대부분 나누어 주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편견과 차별 – 계몽주의 사상가들 대부분 꽤 인종 차별적이었던 것 아실겁니다. 칸트도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인종에 관해 꽤 못난 발언을 많이 했던 것이 사실인데, 어느 순간 생각이 바뀌어, 끝내 어떤 인종이라도 다른 인종을 종속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사상에 따르면 논리적으로 당연한 귀결이죠. 인종 차별, 혹은 다른 류의 편견과 차별 모두 타인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대하는 전형적인 케이스이니까요. 칸트가 결론 내리길, 이성이 어떤 경우에도 신성하다면, 유럽인이라고 다른 대륙의 인종에 비해 우월하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었던 겁니다.
칸트는 결국 식민주의에 강력히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다른 인종을 종속 시키기 위해 행해지는 폭력과 강압은 결국 인류의 인간성을 말살 시키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식민주의란 가장 부도덕한 체제였던 겁니다.
이런 칸트의 생각은 당시 사람들 기준으로는 획기적이다 못해, 우스꽝스러울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칸트는 한발 더 나아가, 전쟁과 강압을 방지할 유일한 방법은 모든 국가를 하나로 묶을 국제 기구를 형성하는 것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당시에는 모두의 비웃음을 샀지만, 수백년이 지난 후, 그의 사상을 바탕으로 UN이 창설되었습니다.
자기 개발의 의무 – 계몽주의 사상가는 대부분 이상적인 삶이란, 기쁨을 가능한 늘리고, 고통을 가능한 줄이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이런 접근법을 ‘실용주의’라 부르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이 이 접근법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반면, 우리 칸트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 했습니다. 그의 주장을 일명 ‘마이클 잭슨 법칙’이라 부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칸트와 마이클 잭슨 모두,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부터 되돌아보고, 자신의 모습을 우선 더 나은 모습으로 가꾸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거든요 (역주-마이클 잭슨의 노래 ‘Heal the World’ 가사에서 따옴)
하지만 칸트는 마이클 잭슨처럼 무대에서 야리꾸리한 춤을 추는 대신, 생 이성으로만 자신의 주장을 펼쳤지요. 바로 이렇게요:
V 우리는 타인의 말과 행동 뒤에 있는 의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상대방이 선한지 악한지, 행복할 자격이 있는지 고통을 받아 마땅한지 판단할 길이 없습니다.
V 또한,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마음 먹는다 해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감정, 가치관, 그리고 기대하는 바를 전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행동이 실제로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V 더 나아가, 대부분의 경우 무엇이 고통이고 무엇이 행복인지 조차도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최근에 이혼을 했다면, 당장은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있겠지만, 1년 후에는 이혼이야말로 살면서 한 가장 잘 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오늘 당장 친구들과 저녁 식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지 몰라도, 그 시간에 미래의 고통을 방지할 활동을 할 기회를 잃었을지도 모릅니다.
V 따라서, 칸트가 주장하길,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 뿐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 뿐이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자기 개발은 곧 자신의 규칙, 즉 절대 원리에 부합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능력을 기르는 일이라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기 개발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예외 없이 부담되는 의무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기 개발의 의무를 잘하고 못하고에 대한 상벌은 사후에 천당과 지옥에서 각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일구어낸 삶에서 바로 주어진다고 보았습니다. 도덕 원칙을 따르는 사람은 자신 뿐 아니라 주변인에게도 더욱 나은 삶을 선사할 수 있지만, 도덕 원칙을 등한시 하는 자는 자신과 주변인 모두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안겨줄 뿐이기 때문입니다.
칸트의 규칙은 파급 효과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스스로 솔직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고 나면, 타인에게도 솔직할 수 있는 능력이 증대됩니다. 그리고 당신이 타인을 솔직하게 대하면, 그들 또한 스스로 솔직해지도록 영감을 주겠지요. 그래서 이들 또한 자신과 주변인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같은 원리에 따라, 솔직함, 생산성, 적선, 혹은 승낙,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마이클 잭슨의 원칙대로라면 칸트의 규칙을 더 많은 사람이 받아들일 수록, 그 숫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어떠한 정책이나 정부 기관보다도 훨씬 거대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존중의 의무 – 칸트는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과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은 근본적으로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대하는 법은 곧 타인을 대하는 법의 밑바탕이 되기 때문에, 스스로 존중하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는 타인을 존중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오늘날의 자존감 높이기 운동에 반대했을 겁니다. 자신을 존중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해 더 기분 좋게 생각하는 것과는 구분됩니다. 자기 존중은 곧 자신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이라도, 그들의 외모, 출신, 인종과 상관 없이, 누구나 기본적인 인권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의식 있는 존재는 모두 동일하게 신성하며, 동일하게 존중되어야 합니다.
칸트는 아마도 자신을 폄하하는 일은 타인을 폄하하는 것만큼이나 나쁘다고 말했을 겁니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은 타인을 속이는 것과 똑같이 나쁘고요, 자신을 해하는 것은 타인을 해하는 것가 똑같이 나쁜거죠.
따라서, 자기애는 배워서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이 세상에 가진 것 하나 없더라도, 당신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도덕적인 의무가 있는 겁니다. 차이를 알겠죠.
칸트 철학의 영향
칸트의 철학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참 문제점도 많고 일관되지 않은 부분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의 기본 사상은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몇 년전 그의 사상을 처음 접하고서 저 또한, 변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20대일 때 위에서 언급한 다양한 자기 개발의 항목들에 힘쓰기는 했지만, 자기 개발을 하려 했던 이유는 대체로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자기 개발을 통해, 제 삶을 향상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자기 개발에 노력을 하면 할수록, 저는 마음 속에 허전함이 커져 감을 느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칸트의 사상을 접하면서 저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80쪽 남짓한 그의 글을 읽고, 수십년간 쌓아 온 제 삶의 전제와 믿음이 전부 휩쓸려 갔습니다. 제가 하는 행동보다도, 그 행동을 하는 의도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알맞는 의도를 찾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는 사실에도요.
칸트는 평생 동안 정해진 규칙만 따르고, 즐길 줄 모르는 그런 따분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사실, 칸트는 젊은 시절에 꽤 격하게 놀았다고 하더군요. 그는 새벽까지 와인을 마시며 카드 놀이를 즐기기도 했고, 자기 집에서 거대한 파티를 열기도 하고 과식하기도 했답니다.
그러다가 마흔 살이 되면서, 그는 갑자기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자기만의 엄격한 생활 패턴을 개발했습니다. 칸트는 이런 변화를 설명하길, 자신이 마흔이 되면서 자신의 행동의 도덕적인 의미를 깨달았고, 더 이상 자신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와 남은 의식을 낭비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칸트는 이런 과정을 자기 개발이라 명명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가능성을 모두 실현할 목적으로 삶을 구축하는 것. 대부분의 사람은 중년이 되어서야 진정한 자기 모습을 찾는다고 보았어요. 젊은 시절에는 세상의 다양한 유혹에 빠져 이리저리 흥분과 절망을 오가며 휩쓸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모습 또한, 목적보다는 더욱 많은 수단을 갈망하고 확보하려는 모습이기도 하지요.
진정한 자기 개발을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도록, 자신을 이겨야만 합니다. 대부분은 이생 동안 자신을 완벽히 마스터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같은 목표를 향해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고, 칸트는 그렇게 믿었습니다.
칸트의 기준으로는, 이생에서 할 일은 그 뿐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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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맨슨의 저서: 희망 버리기 기술 신경 끄기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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