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FJ

[INFJ] 내향 직관의 맹점

멜리비 2019. 6. 5. 08:12

내향 직관에 관한 인터넷 상 각종 글을 읽다 보면, 내향 직관이 마치 신비로운 초능력이라도 되는 것처럼 묘사하는 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내향 직관을 지나치게 이상화하는 것은, 이를 지나치게 믿는 INFJ의 발전을 저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향 직관이 INFJ만의 필살기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내향 직관을 잘 발달시킨 INFJ는 전지전능한 초능력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향 직관을 요하는 작업에 한해 조금 더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에 불과하다. (이 자체도 이미 충분히 멋지긴 하지만.) 내향 직관으로 사람이 세상살이를 하면서 해야 하는 모든 일을 커버할 수는 없습니다.

필자에게 내향 직관이란, 마치 불투명한 검은깨죽 같은 느낌입니다. INFJ들은 일상 생활을 해 나가면서 이 검은깨죽에 다양한 정보를 휙휙 넣습니다. ISFJ나 ISTJ라면,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만 똘똘하게 골라 내어, 차곡차곡 저장해 두는 반면, 우리 INFJ는 이미지, 느낌, 햇살, 글, 사람에 대한 기억, 불편했던 기억, 맛있는 음식을 맛보았던 순간 등등 모든 것을 그저 던져 두고 봅니다. 마치 마트에 가서 한 선반에 있는 물건을 전부 바구니 속에 쓸어 넣는 그런 느낌으로요. 그러면서 나름 열심히 하루를 보내는 와중에 검은깨죽에서 알맹이가 떠오릅니다. 아항!하면서, 새로운 통찰, 개념, 혹은 틀이 떠오릅니다.

이 과정 자체가 워낙 불투명하고 수동적이라, INFJ가 실제로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정보를 꺼내 들 가능성은, 필자의 경험으로는, 조금 낮은 것 같습니다. ISFJ/ISTJ들이 가나다순 및 연도별로 필요한 정보를 머리 속에 가지런히 정리해서 다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것과 달리, INFJ는 절실한 순간에 검은깨죽 옆에 쭈그리고 앉아 알맹이가 떠오르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설정이죠.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인류를 구원할 통찰력을 얻을 가능성이 높다고도 하지만, 아침에 차 열쇠를 두었던 자리를 기억해 낼 가능성은 낮은, 그런 뇌구조입니다.

INFJ가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INFJ 모두 그런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 또한 INFJ다운 오류겠지만 (혹시나 본인은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분 계시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INFJ는 팩트와 추정을 혼돈하는 경우가 타 유형에 비해 많은 것 같습니다. INFJ가 주기능 삼는 내향 직관은 팩트 하나하나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팩트가 그려내는 패턴에 초집중하는 기능입니다. 팩트가 충분히 확보된 상태에서는 패턴의 정확도가 나름 높을 것입니다. 나아가 타 유형은 감지해내지 못하는 이면의 원리도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팩트가 충분치 않을 때에는, INFJ는 팩트를 더 확보하려는 노력 대신, 자신이 이미 유추한 패턴에 들어 맞는 추정치를, 팩트가 있어야 할 자리에 꽂아 버립니다. 그리고 그 추정치가 팩트라고 굳게 믿는 오류를 범합니다.

이런 상황을 타 유형의 입장에서 본다면, 넘겨 짚는 것으로 보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확신에 차서 반드시 그럴 것이라고 우기는 사람은 아주 피곤한 사람이죠. 우리 INFJ가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세심하게 파악할 줄 아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이런 경향이 어떠한 상황에서든 모두 나타나는 것일까요? 내가 오래 알았고, 자주 만났던 사람일수록 상대방이 굳이 입 밖에 내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기분을 속속들이 아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버스 정거장에서 처음 마주친 사람이 나를 “그런 눈으로” 보았다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넘겨 짚기에 불과합니다. 이 두 가지 상황을 잘 구분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내 느낌에 반드시 이럴 것이야!라는 강한 확신이 들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조금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그런 걸까? 이런 과정을 거치기 위해 INFJ 스스로 우뚝 서서 자신의 판단 과정을 다시 한번 짚어볼 수도 있고, 간단한 인터넷 검색을 통해 팩트를 확인할 수도 있는 법입니다. 또한, 주변에 감정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 (혹은 감정이 결여된?) 사고형 친구가 있다면, 나의 통찰에 관해 털어놓고 의견을 구해볼 수도 있는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주변의 ISTJ나 INTP 친구들은 필자에게 언제나 고마운 존재들입니다. 가끔은 그들의 직설적인 말로 상처를 입기는 하지만, 대체로 내가 지나치게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잘 막아 주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내향 직관은 INFJ에게 주어진, 조금 모양새가 이상하고 사용법이 어색한, 축복입니다. 이 기능을 잘 보호하고 길러내어, 우리만의 능력으로 키우려는 노력의 이면에는, 적절치 않은 상황에서도 마구 활용하려는 경향을 절제하고 통제하는 노력이 함께 곁들여져야 한다고 봅니다. 이는 자신의 생각에 언제나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겸손함을 갖추는, 성숙한 인간이 되어가는 길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